히 9:12-14, 9:25-26, 10:8-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의 영원한 속죄제물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2-14)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5-26)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8-14)
예수님은 단번에 우리의 죄를 속죄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매일매일 짓는 죄까지 그때그때마다 처리하시고 하나님께 새롭게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셔서 행하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 사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크리스마스 사건입니다.
예수의 속죄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는 거룩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을 회복시켜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처럼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만이 예배와 기도, 찬양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 있고, 거룩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가르쳐서 성별되고 구별되어졌기 때문에 이들을 거룩한 사람, 즉 성도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바쳐져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도가 되려면 내게는 어떤 부정한 흠과 점과 티가 없어야 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에게서 스스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하고, 그 예배를 통하여 거룩이 회복되고, 거룩이 충만하여져야만 그 능력으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속죄 예배를 통하여 거룩이 회복되고 이 거룩이 삶의 현장에서 방출될 때 완전한 예배가 됩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곧잘 넘어집니다. 그래서 안식일마다 드리는 속죄 예배를 통하여, 죄 사함 받고 거룩이 회복되고 그 거룩의 힘으로 다시 한 주간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속죄 예배의 반복과 거룩의 회복은 이 땅에서 주님 만날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현장에서 거룩을 방출하는 것이 속죄 예배의 연장이요, 이것이 성도의 길이며 구원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샬롬.
유대인들은 다섯 살 이전부터 성경을 가르치는데 제일 먼저 레위기를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레위기를 삶의 규범으로 정하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모세에게 회막문 앞, 즉 성소의 문 앞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성소 앞에는 번제단이 있습니다. 번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기에 제일 먼저 제사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성소의 문 앞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레위기 후반부는 시내 산에서 말씀하십니다. 죄 사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죄 사함 받는 것이 제일 먼저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며 죄 사함 받은 자의 생활은 반드시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이 레위기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약 일 년을 넘게 머물렀었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성막을 건설함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시작되고 성막 중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며(레위기 법) 성막을 중심으로 진영을 배치하고 난 뒤 시내산을 떠나 본격적으로 광야로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를 기록하신 목적은 거룩의 회복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을 하나님의 백성들 하여금 회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19:2)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거룩하여야 합니다.
거룩이란 '카도쉬'라고 하는데 세상의 모든 것과 분리되고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카도쉬와 함께 쓰는 말이 '헤렘'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든 것도 거룩한 물건, 즉 성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몸뿐만 아니라 가진 것 모두가 거룩하여야 합니다(레 27:28).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레 27:28)
거룩이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 지는 것, 하나님께 구별되어 바쳐진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그 과정이 흠이 없고 온전하고 완전해야 되는데 이것을 정결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정결함을 입어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드려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양이나 소나 비둘기는 반드시 정결한 짐승이어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그냥 부정한 짐승일 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끗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하며 정결한 삶을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사람은 부정한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모든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기에 때문에 부정한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돈을 정당하고 깨끗하게 노력해서 벌었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은 돈은 거룩한 성물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한 돈이 되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은 거룩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섬김과 성물에는 먼저 정결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정함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거룩한 불에 타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 샬롬.
거룩이란 말 '카도쉬'와 꼭 함께 기억하여야 할 말이 '헤렘'이라는 단어입니다.
헤렘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아무리 부정하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아 전부 불태워 없어질 것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그 모든 예물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기 때문에 아까워서 다시 되찾는 일이나, 얼마를 숨기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거룩하기 때문에 내 것으로 주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이란 하나님의 중심이요, 본체이시기 때문에 거룩을 침해하는 자는 결코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엄청난 돈을 하나님께 드려놓고서도 즉사한 이유는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자기 생각으로 얼마를 떼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를 보면 성물과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도둑놈이라 지적하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헤렘은 절대로 손을 대면 안 됩니다. 헤렘을 부정하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침해하고 도둑질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죽고 맙니다.
예를 든다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사건이나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인 헤렘에 속한 것인데 아간이 자기 욕심으로 금과 은, 옷 얼마를 취했다가 그와 함께하는 생명과 함께 아골 골짜기에서 죽고 맙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것은 반드시 죽여라(헤렘)는 말씀을 듣고도 승리한 후, 자기 생각으로 양과 소를 취했다가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빼앗기고 그는 죽고 맙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전부 거룩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라도 내 것으로 주장하거나 아까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레위기 27:28-29절의 핵심은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헤렘을 말합니다.
생명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전부 하나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정이나 욕심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진멸한다, 죽인다, 없앤다는 개념은 나의 욕심으로 내가 그 어떤 것도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헤렘이라는 전쟁이 시작되면 인정 사정없이 죽여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끊어내어라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이나 인정이나 사정에 걸려서 네가 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정말 그를 죽이려고 칼을 들었고, 입다는 자기의 딸을 하나님께 서원했기 때문에 그대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오늘날 문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내 생각과 판단과 내 계산이 들어 있어 거룩이 상실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거룩함이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의 모든 순서마다 신령과 진정함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예배를 찾으신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구원의 완성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마다 거룩이 상실되었으니 어떻게 구원의 완성을 이루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려면 반드시 자기 생각과 계산을 버려야 합니다.
부정함이란 내 욕심과 인정과 사정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왜 성도라고 하면서 거룩이 없을까요. 하나님께 나가는 자가 왜 자기 생각대로, 자기 판단대로, 자기 식대로 신앙생활을 할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자 외에는 하나님께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생각대로 편리하게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부정한 모든 것을 깨끗하게 씻는 정결한 샘이 되어 모두를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여야 하는데 교회가 부정하고 오염되어 버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왜 마지막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의 강단에서부터 시작되는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은혜만 강조하지 마십시오.
거룩은 은혜가 아닙니다.
물론 거룩을 사모하는 사람은 거룩해지기 위하여 거룩함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죄 많고 부정한 사람은 절대로 거룩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절대로 나아갈 수가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샬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 정결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정결이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역 속에서 하는 일이고, 거룩은 하나님의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하나님 보좌 주변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존재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거룩이 방출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더 거룩하여집니다.
예를 들면 인류 가운데 거룩한 나라는 이스라엘이고, 그리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거룩한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중에서 더 거룩한 사람은 대제사장입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벧전 2:9절에 보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기이한 빛에 들어가는 자로 선택되었다고 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원래 우리는 어둠 속에 살아가는 부정한 존재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빛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 같은 제사장이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거룩을 회복하여 중보기도를 드림으로 죄 없이 함을 주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는 거룩한 힘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들이 걷는 걸음마다 거룩을 방출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도 거룩의 등급 있으며 하늘나라에도 거룩의 등급이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에서도 질병이나 흠이 있는 자들은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처럼 부정함이 있는 자들은 거룩한 사람들이 사는 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중에 들어오려면 거룩한 제사장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성소 안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속죄제를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레 13:45-46).
예를 들면 전쟁에 나갔던 군사들이 승리하고 돌아온다 할지라도 반드시 속죄제를 드려야 거룩한 진중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거룩하지 않은 장소에서 일어났고 사람의 생명을 많이 죽였고 죽은 시체를 많이 만졌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부정한 일이기에 이것을 제거하지 못하면 거룩한 장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부정한 자들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거룩이 손상되고 오염되어 부정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군사들이 속죄제물로 드리려면 엄청난 정결한 짐승들이 죽어가기에 그것을 대신하여 황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삼아 그 소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태워 재를 만들어 물에 섞어 군사들이게 뿌림으로 부정함을 씻어줍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속죄할 때도 똑같은 방법을 씁니다.
왜 이런 일을 하여야 할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진영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곳에 있다가 거룩한 진영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정결 예식을 하고 난 다음에 거룩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거룩과 부정이 뒤죽박죽 되어 살고 있고 정결함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내가 죽는 길인줄도 모르고 들어옵니다.
오늘 모든 부정결함이 씻어지고 거룩이 회복되게 하소서. 샬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당연히 거룩하여야 합니다.
거룩이란 '카도쉬'라고 하는데 구별하다, 거룩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부정한 곳,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입니다.
카도쉬란 말과 함께 쓰는 말 중에 '헤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고 헌신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것은 거룩하여야 합니다(레 27:28).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저주받아 없애기 위하여 바쳐진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어 거룩하게 바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헤렘으로 드리는 것, 입다의 딸을 헤렘으로 드리는 경우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그 무엇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다면 이삭은 어떤 명목으로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십니다.
또한 저주받은 것을 없애기 위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헤렘도 절대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제사드릴 때 쓰는 생축은 헤렘이기에 죄로 말미암아 전부 불태워 버립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려주어서도 먹어서도 안됩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것은 하나님 것, 즉 헤렘이니 남녀노소 젖먹이 양이나 소까지 전부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양과 소를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명목으로 살려 둡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사울 왕의 자리를 뺏아 다윗에게로 옮겨버립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자는 그 어떤 자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구원이나 선택까지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헤렘은 처음 난 것과 첫 것과 생명을 위한 속죄제입니다.
헤렘은 절대로 내 것으로 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나니이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서원한 예물 중(헤렘) 얼마를 자기 것으로 취하다가 즉사하고 맙니다.
여리고 성이라고 하는 싸움 자체는 하나님의 헤렘이기 때문에 그 성 안의 것은 그 어떤 것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약간의 금과 은과 옷을 취했다가 저주받아 그 가족과 함께 죽고 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로 죗값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쳐진 헤렘이었기에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거룩이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 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되거나 정을 주어서도 안됩니다.
교회가 거룩한 헤렘이 되면 성전이 되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은 어떤 부정함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거룩한 것에 예배하는 자는 성도라고 하는 헤렘이 되기 때문입니다.
카도쉬와 헤렘,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두 단어에 구원이 있고 축복이 있고 생명이 있는 반면, 잘못하면 저주받아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샬롬.
2023.02.16 - [거룩에 대하여] - 거룩 이야기
2023.03.15 - [찬양과 기도와 예배] - 레위기 제사법,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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