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은 새 성전에서 생명물이 흘러 온 세상을 살리는 환상을 봅니다(겔 47). 에스겔은 하늘의 새 도시 새 예루살렘 성을 보았고 그 성은 천국에서 이 땅에 내려와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히 떠나지 않는 성전이었습니다.
다윗도 성소에서 시냇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시 46:4~6).
그런데 주님은 새 예루살렘 성전을 말씀하면서 그 성에 들어갈 자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 즉 우리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3:6, 6:16).
에스겔은 새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면 여호와 삼마의 백성들이 그 성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얼마나 큰지 그 장엄함에 그대로 엎드려 버립니다.
성전 안에는 엄청난 방들이 있고 방 안에서는 제사장들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됩니다. 그 성 이름이 바로 여호와 삼마였습니다(겔 44:4).
여호와 삼마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 삼마 성에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아갑니다.
하나님 영광을 보며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성전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려고 기도합니다.
세속적인 제사장들은 죄를 묵인하며 살기에 성전의 순결이나 거룩을 지키려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삼마를 본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에는 가증스러운 것을 결코 묵인할 수 않고, 성전의 순결함을 지키려고 성전 문지기가 되려고 자청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의 성전에는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절대로 들어올 수가 없다고 강조합니다(겔 44:9).
하나님께서도 성전 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거룩한 성전에 절대로 못 들어오게 막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순결하지 못한 마음의 소유자는 하나님 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쫓겨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여호와 삼마 성전에는 악의 모습이나 죄의 흔적이나 사단의 계략이 전혀 없습니다.
여호와 삼마의 성전에는 주의 영광이 가득하고 주의 영으로 충만한 자들만 거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겔 44:13).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성전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샬롬
왜 하나님께서는 영적 지도자들을 향하여 양의 탈을 쓴 늑대, 유혹하는 자, 아첨하는 자, 타협하고 변질된 자들이라고 지적을 하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거나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새로운 말씀을 주지 않습니다.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하고 귀에 좋은 소리만 하며 우상과 불의를 함께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 즉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된 목자, 양의 탈을 쓴 목자들입니다.
주의 책망이 있는 자에게는 새로운 말씀을 주실 수도 없고, 주셔도 듣지를 못합니다.
새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불경건한 영적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분이 기도 중에 '너는 나의 말씀의 신부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부족하거나 오염되거나 변질이 되면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요, 부흥의 말씀이요, 죽은 자를 살리는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기만 하면 물이 포도주가 되며,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능력과 역사가 내 삶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르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입니다. 그곳에는 의롭고 충성스러우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곳에는 몸과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만 거합니다.
에스겔은 여호와 삼마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은 완전히 새롭게 구성된 사람임을 봅니다(겔 44:10-13).
새 성전에서 새로운 백성들을 인도하는 새로운 제사장들을 사독 제사장이라고 기록합니다(겔 44:15-16).
사독은 '옳다, 의롭다'는 뜻으로 다윗이 통치할 때 마지막까지 다윗과 함께했던 정절이 있는 제사장입니다.
무엇보다 사독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요, 충성스러운 자였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때도, 아도니야가 다윗을 반역할 때도, 많은 제사장들이 그를 따라갔지만 사독만큼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다윗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며 지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을 찾으며 끊임없이 성령님과 교제하고 항상 구별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만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마지막 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왕 같은 제사장들은 바로 사독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가르쳐서 계시록 14:4-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양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4-5)
샬롬.
사도 요한은 여호와 삼마 성전에는 사독 같은 제사장만 있는데 우리를 사독 제사장처럼 세웠다고 기록합니다(계 5:10, 벧전 2:5,9).
이것은 마지막 새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이 되려면 사독 같은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의 주직무는 중보기도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희생제사와 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드립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마지막 때, 거룩한 사독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구별하여 드려야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축복을 계속하여,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아침, 저녁으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삼마 성전에 거하려면 사독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삶을 실제적으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는 위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신비스러운 영적 경험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여호와의 쉐키나,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의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늘 내 삶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무엇인가를 구별할 줄 압니다.
여호와 삼마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임재가 가득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내 사업터, 내 집, 내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 그분의 쉐키나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육에 속한 것임을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거룩과 불경건이 무엇인지 알아지고, 사람들이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여호와 삼마의 성전에 거하는 사독 같은 제사장입니다.
오늘부터 나의 모든 것은 예수의 인도만 받으며,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여호와 삼마의 성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사업터, 일터, 내 가정마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여호와 삼마의 성전이 되어 그 나라의 모든 축복을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누리는 사독 제사장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샬롬.
2023.02.05 - [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 삼마 하나님 (에스겔 48:35)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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