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21-22절을 보면 형제를 향하여 라가 raca(바보)라 하는 자마다 지옥에 간다고 기록합니다. 즉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말은 살인죄와 같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남을 실족케 한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마 18:6)라고 하고 나의 손이나 발이 나를 실족케 하면 찍어내어 버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마 5:8) 것이 낫다고 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믿고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범죄 하는 신체의 일부를 상하게 하는 사림들도 실제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신앙과 맞지 않다고 입술과 마음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정죄하여, 실족시키는 살인죄를 범하면서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살인적인 신앙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쯤은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자들을 돌로 쳐 죽여라라는 말씀 때문에 실제 유대인들 중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안식일을 더 잘 지키기 위하여 더 많은 규례와 법을 정하여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금도 힘들게 지키고 있습니다.
생각하여 보십시요. 남에게 바보라고 말 한마디 했는데 주님은 살인죄를 적용시키고 안식일을 더 잘 지키려는 바리새인을 향해서는 주님께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다면 어떻게 하여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십계명이란 무조건 지켜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니 6번째 계명을 지켰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이나 행동으로 사람들의 인격이나 마음이나 정신과 영혼을 수없이 죽일 때가 많습니다.
칼 대신에 저주, 욕, 화, 분노, 멸시를 상대방에게 휘두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억하십시요. 나의 말과 행동과 마음으로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죽이면서도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았으니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내세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전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요 살인자들 이랍니다....... 샬롬.
덕(virtue)이라는 말을 헬라어에서는 '아레테(ἀρετή)'라는 말과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아레테'라는 말은 인간의 힘과 능력과 노력으로 자신의 덕을 쌓는 것이며 '디카이오쉬네'라는 말은 하나님과 내 영혼의 관계에서 쌓는 덕을 말합니다.
즉 '아레테'는 내가 도덕적으로 노력하고 사람들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살인하지 않는 것이며 '디카이오쉬네'는 살인이란 남을 슬프게 하고 하나님과 내 영혼이 슬퍼하며 하나님과 나와 이웃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아레테'의 삶을 바리새인들은 살았고 예수님은 '디카이오쉬네'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일을 하므로 얼마나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시는 가를 아는, 즉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고 살인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디카이오쉬네'의 사람입니다.
'아레테'의 사람은 문자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한다는 신앙이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여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자기만족을 위한 삶만 살아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여서 이것 때문에 자신을 절제하고 다스리는 신앙, 이런 '디카이오쉬네'의 삶으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우리 함께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다른 사람을 증오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내 속에 증오를 방치하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6 계명은 증오, 미움, 분노로부터 자유로우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분노, 증오, 미움이 없기 위해서는 육체의 일에서 떠나야(갈 5:19-21)하고 자기 사랑, 교만과 거역, 감사치 않는 것, 거룩하지 못한 것에서 떠나야만(딤후 3:2-5) 합니다.
문제는 우리 모두는 육체적인 일에서 떠나고 육적 생각과 욕심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잘 지키려고 해도 우리 마음과 몸은 자꾸만 육체의 일에 끌려갑니다.
그러면 왜 육체에 끌려갈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잘살고 싶기 위해서입니다.
화를 참고 조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생각하여 보십시오. 부모를 거역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도, 사기 치고, 우상숭배하고 거짓술수를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내가 잘살려고 몸부림을 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인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인은 아벨이 없으면 자기 제사를 하나님이 받았을 것이며 자기는 하나님께 인정받아 살았을 것인데 아벨이 방해가 되니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살인이란 자기가 더 잘 살려는 이기적인 마음, 즉 탐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만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십시오. 이것을 버리지 못하면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죽이는 살인자가 되어 버립니다...... 샬롬.
생명이라는 말을 헬라어에서는 '프쉬케(ψυχή)'와 '조에(ζωή)'라는 두 말을 사용합니다.
살인이란 영적 생명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육적 생명을 더 잘 살기 위하여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프쉬케'는 육체적 생명을 말하고 '조에'는 영적생명을 말합니다.
따라서 '프쉬케'의 생명은 육체적인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기에 영적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즉 육체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반대로 육체의 생명보다 영적 생명의 중요성을 알고 영적 생명을 위하여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들은 영적 생명의 기름짐과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6 계명에서 말하는 살인이란 영적 생명이 있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육적 생명을 기름지게 하려고 욕심으로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주실 때 그 영을 받은 자는 '프쉬케'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조에'의 생명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영원한 생명을 넣어 신령한 육체로 만들어 나갑니다.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을 잘 믿어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하여 주신 예수를 보는 영적 눈이 활짝 열린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빛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답니다.
바울은 우리 육체는 질그릇과 같지만(고후 4:6-7) 심히 큰 보배를 담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질그릇 같은 나에게 빛을 넣어 주시어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만들어 주셨으니 이런 사람들은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서 내 감정대로 살거나 나를 몰라주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복수를 하는 일희 일비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육체는 결국 무너지는 장막에 불과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곧 없어질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가해지는 모든 모멸감이나 아픔이나 힘듦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영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잠시 후 이 육체를 벗고 하나님께로 가기 때문에 이 날을 소망하며 항상 영적 생명의 회복에 올인합니다.
신기합니다. 영적 생명이 회복되면 억울함이나 증오심, 탐욕, 거짓, 자존심, 욕심, 불평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리는 계명 자체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답니다.......... 샬롬.
2023.02.06 - [십계명] - 십계명을 주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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