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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은 나의 힘센 용사

by 빛결샘숲 2025.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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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장을 보면 예레미야의 외로움과 힘듦이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시니 마침내 내가 이길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도 믿었던 제자들의 배반, 함께 기도하자고 하여도 하지 않는 제자, 자기 살려고 주님을 쳐다보며 모른다 할 때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그다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요, 우리와 함께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려면 항상 현재 있는 자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그는 삶은 무거운 짐을 집니다.

 

불평 불만하고 욱하며 대드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고 진절머리내시는 하나님의 쓰린 마음을 보며 그 가운데 서서 항상 중재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외로운 길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모세는 부름 받고부터 자기만의 시간은 한 번도 가지지 못했고 어쩌다가 실수를 하면 백성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야단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을 듣고 일방적으로 그대로 전하는 자입니다.

 

물론 위로와 격려도 있지만 거의가 다 예언은 경고 책망 협박 저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언자를 기피합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무엇이 주님의 부담이 되느냐’고 물으니 주님은 ‘바로 네가 나의 부담이라’ 말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무엇인가 끊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부담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으려면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는데 이것을 지적하고 말하면 하나님과 백성들은 더 관계가 벌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언자는 그냥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것뿐인데 고마워하는 자는 한 명도 없고 오히려 떠나가버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격하게 따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속여서 예언자로 불렀고 마치 강간당하는 것처럼 나를 꺾으셔서 하나님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것입니다(렘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렘 20:7)

 

왜 예레미야 이런 과격한 불만을 하나님께 했을까요.

 

그만큼 예레미아는 현실의 삶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데 가까운 사람들마저 떠나가고 자신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사람들만 늘어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그러나 내면에 솟구치는 뜨거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장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백성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바로 세우고 이끌어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심장이 되어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샬롬.

 


 

 

신앙생활이란 울면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렀을까요

 

흑암 혼돈 무지 절망의 세계에 희망의 씨를 뿌려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참 신앙생활이란 땅 짚고 헤엄치는 신앙이 아닙니다.

 

즉 신앙은 안전하고 나에게 좋은 것, 이로운 것만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의 모든 풍습을 거스르고 쭉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 보면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인간적인 힘듦과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랫동안 이 문제로 힘들어하셨습니다(마 26:38-39).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 26:38-39)

 

그러나 오랜 고민 후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나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결정을 분명하게 하면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십니다.   

 

이사야도(사 30:15) 예레미야도 하나님 앞에서 투정하고 불평합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사 30:15)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현존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지금까지 전혀 다른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20:11을 보면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안 보이는 것 같아도 늘 가까이 계시며 가장 강한 용사가 되어 나를 지키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렘 20:11)

 

즉 내가 어려움 당할 때는 어려움을 이기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힘센 용사와 같은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 후에 성전을 재건하고자 할 때 안팎으로 반대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큰 산이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슥 4: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 4:7)

 

하나님의 영에 속한 자는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을 하기에 어떤 문제라도 평지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큰 산 앞에서, 절망의 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할 때, 주님은 내가 너의 울타리가 되고 큰 산을 허물어 버릴 새 역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주님은 매 순간마다 어디서나 부름 받은 자는 그 부르심의 자리에서, 새 언약을 소유한 자답게 분명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손해 보고 조롱당하고 배신당하고 미친 취급을 받아도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나의 힘센 용사가 되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신다는 약속,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큰 산이라도 하나님은 평지로 만들어 버릴 능력을,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이것 때문에 내 영혼은 자유하고,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에게는 늘 힘센 용사가 되어 그들을 이끌어 주시기에 이 답을 아는 자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갑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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