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들어갔다가도 살아났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을 때 모두 순교하게 됩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왜 다니엘은 보호받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보호받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다니엘의 신앙이 사자굴 속에 들어간 것이 핵심인지 사자굴 속에서 살아난 것이 핵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즉 초대교회 성도들과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질 때,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들어갔다는 것이 핵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다니엘의 신앙이지, 사자굴 속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사자들이 나를 잡아먹지 앉는다고 믿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자밥이 될지라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를 하고 사자굴 속에 쳐 넣음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은 나의 신앙은 하나님 보시기에 항상 정확하고 올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의 행동 동기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그 신앙에는 항상 배도의 위험이 따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반드시 직접 내 형편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지고 와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부자들은 소를 제물로 드렸고 중산층은 양이나 염소를 드렸으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제물이든 그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고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는 자들은 절대로 빈 손이나 빈 몸이나 빈 입으로 오면 안 된다는 것이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을 통하여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제물을 반드시 회막문 앞으로 가지고 와서 제물을 직접 제단에서 자신이 잡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 1:4)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찌니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 1:10-11)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그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고 피는 단 곁에 흘릴 것이며 (레 1:14-15)
잊지 마십시오. 다니엘이나 초대교회 성도 들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신앙으로 사자굴에 들어가는 믿음이 핵심이었지 사자 굴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내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먼저 하나님께 분명하게 보여 드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샬롬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내가 가장 좋고 귀하게 여기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짐승을 드릴 때는 난지 팔일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짐승이 어릴수록 깨끗하고 순결하고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찌니라 (레 22:26-28).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제대로 경외하는 자들은 그 중심이 항상 하나님께는 최상의 것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자세를 기지게 되는데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자는 먼저 흠 없는 제물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는 재물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의식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내가 연합하여 일치를 이룹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릴 때는 그 제물에 나의 연약함과 허물, 죄가 주는 저주 고난 질병 가난까지 전부 제물에게 전가시켜 버리는 안수를 하여 우리는 죄와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화목제는 내 모든 영 육간의 간절한 소원을 제물에 안수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중에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원리도 이와 똑같습니다.
고린도후서 9:5-7절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미리 준비하여 마음에 정한 대로 하고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 것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5-7)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고 약속합니다.
번제단에서 드리는 모든 제물에는 전부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희생제물에 직접 안수를 하여야 합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에 대한 고백이 들어가야 하고 화목제물과 감사제물은 감사에 대한 고백과 화평을 위한 간절한 소망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물에 대한 안수는 그냥 대충 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힘을 다하고 뜻을 모아 그 제물에 나의 간절함이 들어가도록 힘써 안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에는 자신의 마음과 사랑과 정성과 간절함을 제물에 안수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에는 제물을 잡아 온전히 드리듯이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냥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거나 쉽게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행위이기에 대단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어떤 예배이든지 간에 예배를 드리는 시간은 처음부터 예배에 올인을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는 목숨 걸고 내 모든 정성을 모아 안수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신앙이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제물에 안수하고 그 제물의 죽음이 내가 죽는 의식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와 예물은 나와 일체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하나님이 열납 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의 중심이 나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샬롬.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바로 내 자신이요, 나의 전부이기 때문에 제물의 죽음은 내가 죽는 것과 같습니다.
레 1:5절과 11절에 보면 제물은 번제단 북쪽에서 여호와 앞에서 죽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 1:5)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 1:11)
동쪽은 죄를 버리는 장소요, 서쪽은 회막문 앞에 물두멍이 있으며 남쪽은 제단이 오르는 계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양을 잡을 때는 아주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제물을 죽여야 합니다. 한 번에 숨통을 자르고 동맥줄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에는 한 순간의 망설임과 계산과 생각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도 이런 자세로 드렸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드릴 때도 이런 자세로 드렸기에 나의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섬기는 자세는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는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과 옛 생각과 옛 성품이 단번에 죽어야만 내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예 못 박아 죽었나니 이제부터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이라'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다 못 박아 죽였다고 고백하고도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 자체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의 자세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갈 5:24 고전 15:31).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4)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하나님께 나를 제대로 드리려면 반드시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경험을 하여야 합니다.
옛사람의 죽음이 처절하게 경험 되어져야 내가 죽고 예수가 다시 사는 神人合一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샬롬.
지금의 세례는 침례에서 시작되었는데 침례란 단순히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 정말 내가 완전히 죽는 예식입니다.
물속에서 거의 죽을 때쯤 그를 다시 살려내므로 옛사람은 죽고 이제 새롭게 내가 산다는 의식이 침례요 세례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바울은 매일 내가 죽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처럼, 내 스스로 내 손과 발에 못질하고 옛사람의 숨통이 끊어지고 동맥줄이 잘라져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찬양할 때마다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나 내 온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제물의 죽음처럼 나 역시 나의 모든 생각과 의지가 주님 앞에서 늘 죽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문제이기에 절대로 양다리 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는 옛사람이 가진 육체의 소유욕이나 생각이 영적 문제와 서로 대적하고 갈등하는 고민이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 완전한 기쁨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 예수 믿으면서도 선악과를 따먹는 이유, 예수 믿는데도 불평불만이 있는 이유는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못해서 그렇고,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물이 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이란 내가 죽고 성령으로 다시 살아난 새사람을 말합니다.
영을 따르지 않고 육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마다 갈등이 있고 인색함이 있고 억지로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전부 옛사람을 제대로 죽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예배 한 번 제대로 못 드린다면 이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아십니까.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온전한 제물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번제단에서 드리는 모든 제물의 의식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예물을 드려야 하며 내가 어떻게 하여야 산제사를 드릴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가르쳐줍니다. 샬롬.
2023.06.12 - [찬양과 기도와 예배] - 제사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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