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나실인들에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포도와 상관된 일체의 것은 손도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실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나실인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즉 나실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 거룩한 즐거움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실인들은 하나님의 절대 은혜 속에서 절대 성결과 거룩을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교훈은 독주를 마시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즉사한 사건이었기에 주의 성전에 출입하는 자들, 혹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실수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실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즐거움으로 살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것은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
모세가 애굽 왕자로 그대로 살았다면 최고의 즐거움과 힘과 권력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받는 삶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부귀보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능욕이 더 고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는 의인 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 안에 감추어진 거룩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나실인의 길을 서원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한 은혜와 행복을 하나님께서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의 행복으로 표현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서 젖을 먹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기쁨을 만끽하는 시간입니다. 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는 시간은 아이에겐 최고의 행복한 시간입니다. 아이가 젖을 먹는 시간은 누가 오라고 하여도 가지 않고 아이에게 거액의 수표를 주어도 받지 않습니다. 엄마의 젖을 먹을 때는 최고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젖처럼 달콤하니 갓난아이들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가 자라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벧전 2: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는 꿀과 같다고 표현합니다(시 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지금은 꿀이 흔하지만 그 당시는 끌이 귀했기 때문에 꿀을 한번 맛보면 그 맛에 취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은 그 삶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젊은 왕이 포도원지기의 딸과 사랑에 빠집니다. 술람미 여인은 왕의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왕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이때부터 거룩한 입맞춤으로 사랑이 시작되는데 침실에서의 사랑은 너무나 황홀하고 그 황홀한 밤은 깊고 푸르게 이어집니다.
이 사건은 예수와 동행하며 하나님과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런 사랑을 가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의 신부가 되어 주님과 사랑을 누리면 누를수록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신랑 신부의 사건은 누구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주님의 신부 된 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은혜를 누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포도주나 독주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면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이상으로 아름다운 사랑이 우리에게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샬롬.
하나님께서는 나실인들이 지켜야 할 규례 3가지를 말씀하시는데
1.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민 6:3-4)
2. 삭도로 머리카락을 밀지 말라는 것입니다(민 6:5).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찌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찌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3-5)
유대인들에게 머리카락은 생명과 고상한 힘을 상징하는데,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머리카락을 밀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힘과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나실인들에게 있어 머리털은 생명이요, 고상한 힘이기에 나실인의 능력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은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경외를 나타내고 하나님께 절대 헌신하는 것을 말하며 내 머리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만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내 생명과 힘의 유일한 것이기에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치스럽고 힘든 일이 생기면 수염을 쥐어뜯고 머리를 빡빡 밀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실인들은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자신의 머리를 지킵니다.
따라서 나실인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은 세상 권력이나 힘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힘으로만 살아간다는 고백이요, 머리카락은 하나님이 내게 씌워준 영광의 관으로 믿기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지켜나간다는 고백입니다.
나실인들의 세 번째 규례는 죽은 자의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입니다(민 6:6-7).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민 6:6-7)
죽음은 죗값으로 오기 때문에 죽은 시체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증스럽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실인들에게 죽은 시체를 가까이하거나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멀리하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경건한 자라고 하여도 죄와 가까이하면 죄에 끌려가고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자는 부정한 것, 부패한 것, 더러운 것과는 반드시 구별되고 떨어져 있어야 만 합니다.
거룩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민 6:8).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 6:8)
나실인들은 3가지 규례, 즉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죽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오직 하나님께만 all in 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을 지켜나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나실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출애굽 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거룩을 회복하고 거룩의 능력을 받아 다시 세상으로 가서 그 거룩한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나실인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나실인들이 거룩에 all in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all in 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는 영계의 거룩한 왕관을 쓴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룩한 영성에 all in 하여 살아가면 하나님은 구별된 요셉의 복, 즉 정수리의 복을 주십니다(창 49:26).
샬롬.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
나실인들이 거룩하고 구별되어 살아가면 어떤 복을 받을까요. 요셉의 복(창 49:26), 즉 구별된 자의 복(신 33:16)을 받는데 이것을 정수리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땅의 보물과 거기 충만한 것과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찌로다(신 33:16)
정수리를 뛰어나다, 구별되다는 말의 뜻인 '네짜르'라고 하는데 나실인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형제들 중에 구별된 사무엘이나 삼손처럼 하나님이 지명한 나실인의 축복으로 세워 나실인의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나실인으로 살아가도록 형들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애굽으로 보냅니다. 애굽에 가서 요셉은 엄청난 고난을 겪지만 끝까지 나실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보디발 아내의 강한 성적 유혹이 노골적으로 있어도 나실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감옥에 들어가서 배신의 아픔이 깊어졌어도 나실인으로 흔들림 없이 살아갑니다.
요셉은 어디서나,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항상 마음과 몸을 구별하고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살아갑니다.
요셉이 항상 마음과 몸을 구별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요셉을 대 애굽 제국의 총리로 마침내 세워 주십니다.
그래서 예언대로 요셉은 형제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복을 받는데 이것을 정수리의 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부름 받은 나실인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분명하게 살면 하나님은 요셉의 축복, 정수리의 축복을 보장하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 부름 받았으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생활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나실인의 분명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반드시 정수리의 복으로 보상하여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복은 썩은 것이고 진짜 같지만 전부 짝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마침내 가장 높이 세워주시는 정수리의 복입니다.
우리는 요셉의 축복을 원합니다. 요셉의 축복은 나실인의 삶을 분명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정수리의 축복입니다.
지금은 나실인으로 지명받아 부름 받은 자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될 마지막 때입니다. 더 거룩하고,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나실인처럼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께 특별한 날과 시간을 정하여 그 시간과 날을 한번 거룩하게 헌신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이 땅에서는 나실인이 받는 정수리의 복을 받고 살다가 주님 오실 때는,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를 분명하게 데려가실 것입니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라는 말 자체가 세상에서 부름 받아 구별된 자라는 뜻으로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그리스도의 지체를 말합니다.
우리는 나실인의 은혜를 어떤 순간에라도 잊지 말고 어디서나 거룩에 all in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네짜르의 복, 정수리의 축복을 이 땅에서 받고 살다가 주님 오시는 날, 주님은 우리를 기쁘게 데려가십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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