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소망(티크바, תקוה)을 두고 살아가기에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현실 너머의 끝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현재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본인이 가진 소망으로 다른 사람을 오히려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예레미야 시대 예루살렘은 바벨론으로부터 3년째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구금되어 있는 예레미야에게 사촌 하나멜이 와서 땅을 사라고 합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연히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라고 하시니 누구에게 의논하지 않고 그 땅을 예레미야는 삽니다.
왜냐하면 전쟁으로 나라가 망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반드시 네가 산 땅은 네 소유가 될 날이 온다고 하는 회복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위기 속에서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회복의 역사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나라는 이제 망하지만 70년 후에는 이 땅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된다고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을 믿고 하나멜의 땅을 누구와 의논하지 않고 그대로 삽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여도 이것이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땅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매매 계약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이 모습을 보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주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들이 바로 B.C. 536년에 제1차 포로 귀환 때 제일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여하고 영광 돌리는 것으로 고민하라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기중심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고 공동체 생활 중심이 아니라 개인주의 신앙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가족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땅을 사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줌으로 자기희생을 통하여 자기 민족들이 도전을 받고, 현재의 고난을 넘어 약속된 하나님의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모두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하늘의 뜻을 이루는 그 길에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샬롬
예레미야는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자신이 밭을 사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보게 합니다.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자기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심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면 반드시 회복이 다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소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나라가 망하더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신앙이란 자기 유익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목적이 되어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먼저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물론 영원한 생명을 얻어 가장 복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이 세상에서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면 주의 때에 필요한 것들을 더하여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의 축복, 장수의 축복, 재물의 축복,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축복, 가족들과 부부의 행복들, 성공적인 삶 이런 복들을 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이런 복들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 분명할 때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예레미야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가르쳐줍니다. 샬롬

예레미야는 지금 조국이 멸망하는 마지막 시간대에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은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피하려고 하고 강대국을 의지한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몽둥이로 바벨론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멸망은 어떠한 것으로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남유다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조국이 없습니다.
포로가 되어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고통과 서러움만 남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자식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끝까지 물려줄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후손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주의 때가 되면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돌아오는 우리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오묘하신 섭리를 보고 다시 자식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물려 줄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로 살아가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을 절대로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징계를 허락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였다 할지라도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사건은 의식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큰 가르침입니다.
주님! 회복을 위한 그날을 소망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게 하소서. 샬롬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지 매매 증서를 만들어 많은 날 동안 토기(켈리, כלי)에 넣어서 보존하라고 합니다.
70년 후에 우리의 자식들이 다시 포로에서 돌아와서 예레미야의 매매 증서를 보고 그때 후손들은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 있었다는 것을 보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기들의 조국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한 원인은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실패하는 범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우리의 후손들은 제대로 섬기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의 멸망 앞에서 이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세대는 멸망하지만 후손들은 절대로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멀리 보는 신앙, 멀리 보는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분명한 자만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이나 이해를 넘어,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 깊은 신뢰와 헌신을 포함합니다. 샬롬
야곱이 왜 라헬을 그토록 사랑했을까요?
라헬은 좋은 아내가 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8:22, 19:14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고 이런 아내를 얻는 자가 복을 얻는다고 기록합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잠 18:22)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 19:14)
솔로몬이 응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이유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이유도 이 세상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행동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어렵고 힘들어도 후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하여 나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정직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록된 성경의 모든 역사가 우리들에게 믿음의 증거가 되듯이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 후손들에게 믿음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눈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입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사건과 사고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한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순간을 살면서 영원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현실을 보지만 더 멀리 보는 것입니다.
현재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알면 멀리 보는 눈이 생깁니다.
그래서 멀리 보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과 달리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혜가 열립니다.
현실에 힘들어하고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한 이유는 근시안적으로 ‘오늘’만 살기 때문입니다.
영어 ‘Present’는 ‘현재’라는 뜻과 함께 ‘선물’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즉 오늘은 현재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힘든 문제에 자꾸만 집착하지 말고 조금만 더 멀리 보십시오.
그러면 내 생각을 넘어선 선물이 오늘 주어집니다. 샬롬.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은 현재 아픔의 시간들이 수일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마치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던 7년이 수일처럼 지나간 것처럼 말입니다.
이사야 40:31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곤고한 날에 처했을 때 자기들의 원통함을 몰라준다고 하나님께 원망할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오직 여호와를 앙망(카와, קוה)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높이 떠서 현재의 한계 상황을 넘어 멀리 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한계 상황에 빠져 있는 자신을 보지 말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당할 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히 12:2)고 하며, 이사야 41:10에서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약속합니다.

출애굽기 14:13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보는가?”보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내 앞에 보여지는 장애물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로만 쉽습니다. 정작 그렇게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앞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뒤에서는 적군이 나를 죽이려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살려면 여기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샬롬.

세상을 사모하고 세상과 벗되어 살다 보면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하고 쉽게 남을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사라지고 결국 신앙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면 누구라도 믿음이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면 약속한 아들인 이삭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처럼 되어 버립니다.
‘엉망’ 혹은 ‘엉망진창’은 ‘일이나 사물이 제멋대로 뒤엉켜 심하게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되어 버린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엉망'이 아니라 ‘앙망’하게 되면 자기의 요구나 희망이 실현되기를 우러러 바라보게 됩니다.
엉망이 자신의 처지나 형편이 어려워 절망의 구덩이에 빠진 인생의 상태를 보여준다면, 앙망은 인생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과 미래의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글자를 살펴보면 ‘앙망’과 ‘엉망’의 차이는 단지 한 획뿐입니다.
그러나 엉망인 인생과 앙망하는 인생은 실제로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 폭풍이 몰려와도 예수님과 함께 비상할 날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기다림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조급하면 방주를 만들지 못합니다.
조급하면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참고 견디지 못하면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를 앙망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함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앙망은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게 됩니다.
독수리에게 폭풍은 창공을 향해 높이 날 수 있다는 소망이고 비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샬롬
조선 시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서양 문물이 조선에 못 들어 오도록 막는 정책이었습니다.
멀리 보지 못하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일본은 물론 러시아, 중국으로부터 큰 아픔을 당하다가 결국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멀미를 하는 이유는 귀 안의 평형기관이 흔들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차 안에서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보고 가다 보니 평형기관이 흔들렸기 때문에 멀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미하는 사람들에게는 멀리 보라고 권유합니다.
멀리 보면 멀미가 진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눈앞의 문제만 보면 항상 어려운 것만 보이기에 불평불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라는 말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땅을 산 이유는 회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렘 29:11, 32:15, 43-44).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모든 사람 앞에서 땅을 사서 매매 증서를 보존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망하여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행동과 희생과 대가를 치러서라도 자기 백성들을 이방인들의 손에서 건져주십니다.
마지막 때의 모든 예언과 말씀과 묵시 또한 반드시 모든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계 22:10).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분이시기에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렘 30:18, 31:12, 33:1-2). 샬롬.
[당신은 누구십니까? 000 이야기] - [이해 안되는 일들(렘 32:6-15)] - 절망의 끝에서 산 소망의 땅: 하나님의 인치심과 회복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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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사촌 하나멜의 밭을 삽니다.지금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부터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데 땅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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