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1-6)
우리가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신앙이 되면 우리 하나님은 멀리 계신 3인칭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는 신앙이 되면 하나님은 내게 2인칭 하나님이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큰소리로 '주여'하면서 하나님을 찾을 때 이것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3인칭)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2인칭)을 부르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이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욥 31:38-40절에 보면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의로움을 계속 주장합니다. 내가 지금 엄청난 고난을 받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께 결백하다는 것입니다.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 하였으면 밀 대신에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에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 31:38-40)
욥은 동방의 의인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날, 재산과 가족과 자녀를 다 잃어버리고 욥의 몸은 심한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고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계속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즉 욥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여도 욥의 하나님은 멀리 있는 3인칭 하나님으로 계속 나타납니다.
그런데 욥 42:1-4절을 보면 욥은 드디어 하나님이 누군지를 직접 발견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욥42:1-4)
하나님은 자신이 의도한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절대주권은 그 누구라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신이 직접을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나의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욥은 42: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다'라고 먼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지금까지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성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종교적인 전통이나 조상의 가르침이나 관념론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하나님은 나와 너의 2인칭 관계가 아닌 제3의 하나님 즉 3인칭 하나님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순전함과 의로움을 계속 주장해 왔습니다. 자기는 죄가 없는데 왜 하나님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지를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제 하나님을 내가 눈으로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당신과 나의 2인칭 관계의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나의 하나님이 내게 3인칭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고 없다는 사실입니다. 샬롬.
https://youtu.be/nP9m5TLChzg?si=dbIV6C8bEzDSZ6e8
욥은 '이제 하나님을 내가 눈으로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당신과 나의 2인칭 관계의 하나님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3인칭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 즉 2인칭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과 우리는 직접적인 관계가 되기 때문에 내게 대한 모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눈에 보입니다.
듣기만 하는 신앙은 3인칭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직접 보고 듣는 신앙은 2인칭 하나님입니다.
3인칭 하나님은 교리적 교훈적 전통적 학문적 습관적 의무적으로 믿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눈으로 보고 소통하는 하나님은 2인칭 하나님입니다.
시 141:1-2절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시 141:1-2)
시 141:1-2절의 기도는 하나님을 멀리 있는 3인칭 하나님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예배할 때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교통하고 대화하는 2인칭 하나님을 발견한 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시 141:8절에 보면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멀리 있어 나와 교통이 어려운 3인칭 하나님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과 내가 서로 눈으로 보고 직접적으로 대화하며 기도하는 2인칭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서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 응답의 비결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회복, 부흥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나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욥 42:11절에 보니 사람들이 욥을 찾아오는데 진정으로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옵니다. 그런데 위로만 한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고대의 화폐인 케쉬타(Kesitah)를 하나씩 가져오고 금고리 하나씩을 가져옵니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욥 42:11)
결국 42:1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의 복이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셔서 갑절의 복을 누리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욥 42:12)
귀로만 듣던 3인칭의 신앙에서 '하나님과 나'라는 2인칭의 신앙이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샬롬.
https://youtu.be/gbCgNieRJlA?si=zfK_ZIVKm71oCERb
부흥이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부흥이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것, 자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포로 된 곳에서 자유함으로, 어둠의 하늘에서 빛의 하늘로 바뀌는 것이 부흥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병든 자가 치료를 받는 것, 방황하는 자가 방향을 잡는 것 모두가 부흥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에게 태의 축복을 주시고, 살 맛을 잃은 실직자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하루하루 복잡한 머리로 사는 백수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부흥입니다.
삶의 포기, 삶의 불안, 삶의 무능으로부터 해방되어 삶의 이유를 찾도록 만드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부흥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설 때 주어지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찾을 때 일어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 부흥으로 시작됩니다.
욥처럼 귀로만 듣던 신앙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때 일어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암 5:2-3절을 보면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 하십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어느 날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었기에 그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애가(哀歌)를 지어 불렀습니다. 애가라는 말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하여 부르는 조가를 뜻합니다.
아모스가 판단하기에 북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목숨과 같았습니다. 더 이상 미래가 없는 절망의 상황이었습니다.
아모스는 현재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이 무너진 시대로 보았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이란 표현은 가장 활동적이고 강한 전성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는 감히 어떤 외부의 세력도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천 명이 싸우러 나간 성읍에는 백 명만 살아남고, 백 명이 싸우러 나간 성읍에는 열 명만 살아남는 파멸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힘을 쓸 수 없고 다시 일어날 힘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엎드러진 절망의 때가 임박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는 이런 파멸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길이 있다고 외칩니다.
그 방법이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4)
구원의 길, 희망의 길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실하게 정립될 때 열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3인칭 하나님에서 나의 하나님으로 2인칭 하나님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산다'는 말은 이제 욥처럼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 즉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1, 2인칭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이루어지면 모든 부흥이 시작되고 살 길이 생긴다는 약속입니다. 샬롬
2024.12.13 - [짧은 영성의 만남] - 회개와 용서(렘 31:15-20)
회개와 용서(렘 31:15-2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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