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는 '할렐루야, 아멘, 주여'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붙어 있고 교인들이 기도할 때도 '주여'라는 말을 꼭 사용합니다.
主라는 말은 헬라어로 '큐리오스(κύριος)'라고 불렀고 로마에서는 '도미누스(Dominus)'라고 불렀습니다.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에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는데, 이때 노예들이 주인을 부르는 말이 '도미누스'라는 말이었습니다.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主라고 고백할 때 주님 예수는 나의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신 동시에, 주인 된 예수가 나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확실하게 고백할 때 이것이 나의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롬 1:9-10).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9-10)
오늘날 교회에서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쉽게 가르칩니다(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그러나 롬 10:9-10절에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마음으로 믿어 義에 이르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구원의 조건은 내기 믿는 예수를 내 입으로 主로 시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 주인이시다, 예수는 내 모든 소유주라는 고백이 분명히 나와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3단계가 있는데 예수 믿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습니다(과거).
예수를 마음으로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시기에 그때부터 우리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바꾸어집니다(현재). 그러면 우리는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성화의 과정에 날마다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에는(미래) 완전히 영화로운 삶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 세상은 사단이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 자신을 지키고 승리하려면 입술로 예수를 나의 도미누스라고 고백하여 주님의 보호를 받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게 되면 구원의 능력과 기쁨을 받고 살아가게 되는데 이 능력과 기쁨을 누리며 살려면 어디서나 예수가 나의 도미누스가 되어야 합니다. 샬롬.
예수를 입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主라 시인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머릿속에 예수를 조용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자랑스럽게 주님이 내 인생의 主라고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에 대한 고백을 주저주저할 때가 많고 하찮은 욕심이나 육체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나의 主로 선포하는 것은 나의 主君이 바뀌고 나의 조국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3-14)
지금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사단 마귀는 세상의 진짜 주인공이 아니고 가짜 주인입니다.
사단은 추악하고 잔인한 놈이기 때문에 그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어둡고 혼란스럽게 하어 자신이 가짜 주인 밑에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줄을 모르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믿는 순간에 날 얽매였던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되고 내가 속한 나라가 바꾸어지고 섬기는 주인이 바꾸어져 버립니다.
예수가 나의 主가 되는 순간 우리는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나의 주군이 예수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나의 '도미누스'라 고백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속해 있던 사단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끝까지 우리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즉 영적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는 사단과 전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했을 때는 가짜 주인의 통치 아래서 그러려니 하고 감각도 없이 무지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면 사단의 세력과는 더 이상 어떤 것과도 연결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진짜 주인이라면 나는 예수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나의 왕이 되고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면 그분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확실하게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충성된 종의 자세입니다. 샬롬.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예수가 나의 主라고 고백하여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는 예수를 主라고 입으로 고백할 때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 시대였기 때문에 로마의 왕들은 자신들을 '도미노스'나 '큐리오스'라고 부르라고 모든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나라 사람들은 황제를 우리 주, 우리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로마의 부흥을 위하여 황제는 신의 권위로 나라를 통치하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主나 하나님으로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황제 숭배사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황제 숭배사상을 거부합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은 황제에게 반역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두아디라 지방에서는 황제 신격화를 반대하는 자는 장사도 못하게 하고 일반 시민들에게 받는 1%의 세금을 50%를 더 내게 하고 감옥에 가두고 구타하고 사자들의 밥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지하 동굴인 카타콤에 숨어 들어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정말 예수가 나의 主君이라면 그 예수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는 물론 생명까지도 아까워할 것 없이 바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찮은 욕심이나 한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의 주인 되신 예수를 쉽게 배반하거나 부인하여 버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예수를 주여 주여 합니다. 왜 이렇게 오늘 띠라 제 자신이 초라하고 슬프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샬롬.
2023.06.28 - [짧은 영성의 만남] - 갓을 쓰고 다니는 조선인
갓을 쓰고 다니는 조선인
옛날 선교 초기, 조선에 온 미국인 선교사가 보니 양반들은 모두 머리에 갓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하여 한 유식한 양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머리에 쓴 것이 무엇이요?"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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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主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주여라는 말 한마디에 운명이 갈라졌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충성 맹세가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主라는 말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 모두 각자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나의 主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께서 받으셨던 십자가의 고난에 부끄러움 없이 나도 동참하여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욕먹고 오해받고 직장까지 잃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것을 감수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반드시 하늘의 상급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主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렇게 불러도 아무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예수를 나의 主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내가 십자가를 질 때 모두가 나를 버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자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주님 당하는 모든 고난은 자기도 받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합니다(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3)
그러나 예수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고백은 베드로의 인간적인 결심과 각오로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정말 예수가 자신의 '도미노스'였고 '큐리오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밤이 가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말씀하셨고(눅 22:34) 실제로 베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하여 순간적으로 정신없이 예수를 세 번 부인합니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눅 22:34)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위기상황에 사람이 몰리면 얼마나 비굴하고 나약한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런 것이 인간이 가진 신앙의 한계입니다.
사단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으로 우리를 비참하게 몰고 가서 주님 곁에서 베드로처럼 영적 패배자로 만들어 버리려고 지금도 계략을 세워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은 나의 구주라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적인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정말 나의 주라고 진실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야 하고 그런 사람만이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 있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성령 받고 나서야 무서운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나의 主라고 담대히 고백하고 순교합니다. 샬롬.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주를 부인할 정도 같으면 우리 역시 베드로가 주를 부인한 상황과 똑같은 환경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입으로 아무리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친다고 하여도 거의 모든 신앙인들은 주를 부인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성령이 항상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됩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성령이 붙들어 주시면 어떤 혹독한 상황과 위기의 순간 앞에서도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나의 확실힌 도미노스가 되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절대 헌신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예수를 主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기도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첫 번째 기도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헌신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도미노스', 主라는 말은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소유하며 종의 생사권까지 소유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종에게 뭘 시키든지 간에 종은 어떤 경우에도 no 해서는 안됩니다. 종은 자기 의견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과 종의 차이점은 주인이 종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대로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말에 늦게 순종하는 것도 부분적으로 순종하는 것도 전부 불순종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주인이 무슨 말씀을 하더라도 항상 yes 해야지 no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여 주여 하면서도 불순종합니다.
주님이 무엇을 시키시거나 원하실 때 거의 대부분 늦게 예스하거나 일부분만 예스합니다.
이것은 yes가 아니라 no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면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이 없고 주의 일에 앞장서지 못합니다.
100% 구원의 능력을 내 모든 영역에서 누리며 살아가려면 반드시 예수만이 나의 主라는 고백이 내 삶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샬롬
계시록 3:20절은 주인이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주님을 분명히 믿는 자는 내 인생의 모든 부분의 문을 주님이 主人가 되도록 문을 활짝 열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 교육이나 돈 문제나 결혼문제 심지어 취미생활까지 주님이 못 들어오게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를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일단 주님을 주인이라고 고백하면 어떤 영역에서든지 주님이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지 내가 숨겨둔 어떤 영역만큼은 주님을 객으로 모시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을 안방에 모시지 않고 손님방에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 전쟁도 영적 능력도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실제로는 주님께 나의 모든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열지 못하고 있는 문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오늘도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숨겨둔 모든 문들을 찾아내어 그 문들을 열도록 끝까지 두드리십니다.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는 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숨겨둔 비밀의 문까지 포기하지 않고 문을 열어 회개하라고 내가 숨겨둔 비밀의 문을 오늘도 두드리고 계십니다.
사실 주님이 내가 열지 않고 있는 문을 부수지 않고 계속 노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인격을 그만큼 존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主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니의 모든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기를 바라십니다.
문을 연다는 말은 내 중심의 보좌에 주님을 앉혀 드림으로 내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오시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주와 더불어 먹고 주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는 말은 내 안에 주님이 들어오시면 어두움이 떠나고 마귀가 떠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주인과 함께 종이 먹고 마시는 것을 최고의 특권으로 설명합니다.
주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은 하늘의 은혜와 축복을 공급받는 것이고 마귀가 다시 오지 않도록 보호막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면 내 삶의 모든 영역은 주님의 다스리시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노예의 삶이 아니라 기적의 삶이 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부분을 다 다스릴 때,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주님, 이 영역만은 안 됩니다'라고 하는 불순종의 문이 있으면 주님이 나의 主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을 열지 못함으로 주님께서 나의 문을 부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의 문을 부숴 버릴 때는 내가 바로 그 방 안에서 독약을 먹고 영적으로 죽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방은 다 되지만 절대로 이 방만은 안된다는 그 방이 바로 내가 죽어가고 있는 불순종의 방입니다. 샬롬
우리 입술에는 항상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뜻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에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처럼 기름 부음이 더하여집니다.
로마시대에 예수를 主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과 치료와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主라고 선포하고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마귀의 활동이 중단되고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인은 자기의 종들을 책임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으로 주인으로 선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면 우리 인생은 내가 열심히 사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풍성하고 힘 있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입술로 예수를 나의 主로 시인하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1)
반대로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큰 장벽이 생겨 기도가 막히고 예배와 찬양 등 모든 영적 교류에 장애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마귀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입술에는 항상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자기 백성을 구원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면 나의 모든 영 육간의 문제가 구원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라는 뜻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에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처럼 기름부음이 더하여져 구원은 물론 기름진 삶과 풍요로운 삶까지 더하여지는 복을 놓치지 마십시오. 샬롬
2023.02.14 - [예수님에 대하여]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1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의 이름이 그리스도로 무려 500번 이상 나타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영적 무게가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절을 보면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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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은 이유는 성도들이 예수를 主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로마 황제가 主였기 때문에 만약 성도들이 로마 황제를 主라고 인정하여 주었다면 핍박받지 않고 쉽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변질되고 타협의 신앙을 선택하지 않고 감옥을 가고 직장을 잃고 사자의 밥이 되거나 검투사들의 칼에 죽는 죽음 앞에서도 예수만 자기 인생 유일한 주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적 삶이 결국 로마제국은 4세기 경에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를 나의 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역시 우리에게 영원히 호의를 베푸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제 곧 세상이 끝나는 종말의 시간이 시작되면 엄청난 핍박이 로마시대처럼 시작될 것이고 예수를 나의 主라고 선포하는 자들은 엄청난 핍박을 받는 시대가 다시 도래될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불이익 앞에서 모두가 배도하여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사림들은 예수를 主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권세를 집고 있는 사단 마귀를 따르는 자기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예수가 주인이 아닌 세상에서 예수를 主라고 섬기면 반드시 이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나의 主라고 고백하고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면 주님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영적 권위를 주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예수가 들어오지 못하는 방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이 문을 두드리시면 반드시 잠겨둔 내 비밀의 방문을 열어야 합니다.
열지 못하고 스스로 그 방을 잠그고 있는 것은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는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여버리는 사건이 초대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들는 사람들의 반응의 차이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닫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을 때 별로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자들이라'라고 지적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늘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엡 3:17)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 중심에 계신 자가 예수를 主로 모신 자요, 그들이 진짜 세상을 이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오늘은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예수를 主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과 치료의 축복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主라고 선포하고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마귀의 활동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은 자기의 종들을 책임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으로 주인으로 선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내가 열심히 사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풍성하고 힘 있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입술로 예수를 나의 主로 시인하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1)
반대로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큰 장벽이 생겨 기도가 막히고 예배와 찬양 등 모든 영적 교류에 장애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마귀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적국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수많은 고통을 준 나라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아니라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압니다. 요나는 무서운 풍랑을 만나게 되고 큰 물고기 밥이 되어 사흘 밤 낮 물고기 뱃속에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절박한 기도는 요나를 처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한 니느웨에 그대로 던져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문 열어라'라고 할 때 불순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순종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 끝까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려면 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와 조정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主라고 고백하는 이상 반드시 나의 모든 삶을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고 우리가 그분만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내 삶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라나타.
하나님께서는 예수께 모든 역사와 만물이 복종케 되는 권위를 주셨습니다(빌 2:9-10).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잠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는 꼼짝 못 합니다.
농구 선수들은 키가 거의 2m에 육박하고 덩치도 100kg 정도 됩니다. 그러나 농구 경기 중에 키 작고 왜소한 심판이 휘슬을 불면 그 엄청난 덩치의 선수들이라 할지라도 꼼짝 못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스리는 최종 권위를 예수께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아무리 힘이 세어도 예수님이 심판의 휘슬을 불면 꼼짝 못 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리서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우리 인생을 주께 순종하는 모드로 고정시켜 놓으면 절대로 사단은 우리를 손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권위가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만 나의 主人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살아가셨던 것처럼, 매 순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내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셔서 살아가는 삶만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정상적인 삶입니다.
주님이 나의 主가 되시면 주님이 가지신 그 마음 그대로 우리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과 평안과 만족과 소망과 담대함과 감동과 감격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주님이 나의 진정한 주가 되시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살 맛을 느끼고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행복한 날들을 이어가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나오는 주인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아도나이(אֲדֹנָי)”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후 2:21)
'아도나이' 하나님은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과 선지자들과 바울,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 하나님,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요.
하나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었던 나를 몰아내고 내 심령 가운데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 바로 ‘아도나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도나이 하나님을 나의 主라고 부르며 고백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의 위치가 정해져 버립니다.
‘아도나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니 나는 그분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자원하여 선택한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해서 나오는 고백이 바로 이 아도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도나이 하나님이 이제 나의 주인이 되시니 이제 주인 되신 주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우리 남은 삶이 행복하기를 을 함께 기도합니다. 샬롬.
2023.02.18 - [하나님의 이름] - 아도나이 하나님
아도나이 하나님
‘아도나이’란 나의 주인, 나의 주님이란 뜻으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대체하는 이름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들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 아도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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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나의 主라는 말 즉 '아도나이’라는 단어는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사용했지만 사사기 6장에서도 등장합니다.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 마치 한명하고만 싸우는 것처럼 도와주고 돌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면 어떤 불가능한 문제 앞에서도 쉽게 풀어주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고, '아도나이'라고 부를 때, 이 고백 속에는 엄청난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 나와 동행하시고,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약속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 세워지는 하나님과 우리의 특별한 관계가 됩니다.
아도나이 하나님은 자기 사람을 끝까지 온전하게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주' 또는 '아도나이'라고 부를 때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순종의 자리에 앉아 있기를 바라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면 우리는 그저 그분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로는 이 부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세워지지 않거나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겨나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을 보면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하십니다.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 주님',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도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너희가 나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지 않다는 책망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 안될 것은 아도나이 하나님을 나의 主라고 부르며 고백하면 그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는 主從관계로 정해져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도나이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면 우리는 스스로 그분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시면 내가 스스로 자원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해서 나오는 고백이 아도나이 하나님이라면 내 스스로 그분의 충성스러운 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은 억압이나 속박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입니다.
우리를 온전히 끝까지 함께하여 주시는 아도나이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 그분의 종이 됨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행복한 종의 누림을 가지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두 자매의 섬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영접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시자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즉시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준비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얄미울 정도로 방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데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기를 도와 예수를 대접할 생각도 없이 예수와 함께 하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를 보내주어 자기가 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느냐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다는 예수님을 더 잘 대접하고 섬기기 위하여 일하면서도 많은 걱정과 염려와 불안이 있었다는 것이고 마리아는 마르다의 노력은 아랑곳없이 예수님과 함께 앉아 하나님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은 우리 역시 예수를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를 잘 가르쳐 주는 사건입니다.
즉 마르다처럼 정말 열심히 예수를 섬기고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하는데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과 염려와 조급함이 있는 자들은 예수를 나의 主가 아니라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손님으로 모시는 사는 교인들은 마르다처럼 예수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지만 걱정과 염려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고 있으니 그 손님을 잘 섬겨야 되겠다'라는 열심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리아가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했다는 말씀은 마리아는 예수를 손님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주인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에 먼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마리아에게는 더 좋은 일을 택했다고 말씀하시고 마르다에게는 예수를 섬기면서도 근심과 염려와 걱정이 있다고 말씀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을까요 아니면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주인의 말에 종이 순종하면 물이 포도주가 되고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병든 자가 치료받습니다.
그런데 주를 위하여 죽도록 헌신하며 평생을 주를 위해 살아온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왜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떤 사람은 책망을 받고 어떤 사람은 칭찬을 받을까요.
예수를 내가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지 아니면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는지의 차이점 때문입니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종은 그저 주인이 기뻐하는 일만 하면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베드로 앞에 나타나신 주님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나사렛 땅의 목수였습니다.
경험으로나 지식으로 말하면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시몬 베드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하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철학과 자기의 주관을 거부하는 엄청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삶의 절대적 자세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자기 노력으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주인 예수의 말에 순종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종 된 우리에게 좋은 편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맞는지 깊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예수가 '나의 주主', 아도나이(אֲדֹנָי), '큐리오스(κύριος)', '도미누스(Dominus)'가 되지 못하면 그날에 우리는 많은 수고를 하고서도 잘했다고 칭찬받지 못할 것입니다. 샬롬
2023.02.14 - [예수님에 대하여]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2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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